브루크너 (Josef Anton Bruckner, 1824.9.4~1896.10.11)
오스트리아의 작곡가. 오르간 연주자와 즉흥연주자로서 인정받고 바그너의 작품을 접한 뒤 창작에 자극을 받았다. 미사곡, 교향곡, 합창곡 등을 작곡했다. 19세기 후반 최대 교회음악가였고 최근 최대의 교향곡 작곡가로서도 평가되고 있다.
국적 : 오스트리아
활동분야 : 예술
출생지 : 오스트리아 린츠 근처 안스펠덴
주요작품 : '테 데움'(1881), '제7교향곡'(1883), '제 8교향곡'(1885)
린츠 근처의 안스펠덴 출생. 학교 교사의 아들로 태어나 그도 역시 교사가 되기 위해 교육을 받은 뒤 조교원까지 지냈으나, 그 사이 피아노, 오르간, 통주저음(通奏低音), 화성, 대위법 등을 공부하고, 또 성플로리안수도원의 오르간 연주자로 일하면서 J.S.바흐의 작품과 G.P.팔레스트리나, A.가브리엘리 이후의 교회음악 연구를 계속하여, 그 스스로도 '레퀴엠'(1854)과 '미사 솔렘니스'(1854) 등을 쓰고 그는 30세가 넘어서야 교사직을 떠나 음악가가 되기로 결심하였다.
1855년 린츠대성당의 오르간연주자가 되어 오르간 연주자와 즉흥연주자로서 인정을 받았으며, 동시에 린츠극장 악장인 키츨러에게서 악식론(樂式論)과 악기론(樂器論)을 배워, 고전파와 낭만파의 기악곡형식을 깊게 이해하게 되었다. 그리고 키츨러를 통하여 바그너의 작품에 접하여 창작에 자극을 받게 되었다.
린츠시대에 그는 미사곡 3(제1, 제2, 제3)과 교향곡 2(0번, 제1번) 같은 큰 곡을 작곡하고 1868년에는 빈음악원의 교수가 되어 빈에 정주하였으며, 1878년에는 빈대학 강사도 겸하였다. 제2번부터 제8번까지의 교향곡은 이 시기에 작곡되었다. 브루크너는 바그너에게 깊이 심취하여 1865년에는 그와 만나고 작품도 헌정(獻呈)하였으며, 이러한 그의 행동이 절대음악을 중시하는 전통파(反바그너派로 대표격은 한슬리크) 의 반감을 사게 되었으나 이에 저항하는 그를 위해 G.말러, 괼레리히, 샬크형체, 레베 등이 결속하여 그를 도와 주었으며, 그도 '관현5중주곡'(1879) '테 데움'(1881) '제7교향곡'(1883) '제 8교향곡'(1885)의 성공으로 비로소 작곡가로서의 명성이 높아졌다.
만년에는 병에 걸려 음악학교의 직책을 사임하고, 합창곡 '타펠리트'(1893) '헬골란트'(1893) 등 작품을 썼을 뿐 창작보다는 오히려 옛 작품인 교향곡의 개작과 퇴고(推敲)에 힘을 기울였으며 '제9교향곡'을 완성 못하고 사망하였다. 1891년 그는 명예박사학위도 받았다. 또 그는 19세기 후반의 최대 교회음악가였을 뿐 아니라, 최근에는 최대의 교향곡 작곡가로서도 평가되고 있다.
오스트리아의 작곡가. 오르간 연주자와 즉흥연주자로서 인정받고 바그너의 작품을 접한 뒤 창작에 자극을 받았다. 미사곡, 교향곡, 합창곡 등을 작곡했다. 19세기 후반 최대 교회음악가였고 최근 최대의 교향곡 작곡가로서도 평가되고 있다.
국적 : 오스트리아
활동분야 : 예술
출생지 : 오스트리아 린츠 근처 안스펠덴
주요작품 : '테 데움'(1881), '제7교향곡'(1883), '제 8교향곡'(1885)
린츠 근처의 안스펠덴 출생. 학교 교사의 아들로 태어나 그도 역시 교사가 되기 위해 교육을 받은 뒤 조교원까지 지냈으나, 그 사이 피아노, 오르간, 통주저음(通奏低音), 화성, 대위법 등을 공부하고, 또 성플로리안수도원의 오르간 연주자로 일하면서 J.S.바흐의 작품과 G.P.팔레스트리나, A.가브리엘리 이후의 교회음악 연구를 계속하여, 그 스스로도 '레퀴엠'(1854)과 '미사 솔렘니스'(1854) 등을 쓰고 그는 30세가 넘어서야 교사직을 떠나 음악가가 되기로 결심하였다.
1855년 린츠대성당의 오르간연주자가 되어 오르간 연주자와 즉흥연주자로서 인정을 받았으며, 동시에 린츠극장 악장인 키츨러에게서 악식론(樂式論)과 악기론(樂器論)을 배워, 고전파와 낭만파의 기악곡형식을 깊게 이해하게 되었다. 그리고 키츨러를 통하여 바그너의 작품에 접하여 창작에 자극을 받게 되었다.
린츠시대에 그는 미사곡 3(제1, 제2, 제3)과 교향곡 2(0번, 제1번) 같은 큰 곡을 작곡하고 1868년에는 빈음악원의 교수가 되어 빈에 정주하였으며, 1878년에는 빈대학 강사도 겸하였다. 제2번부터 제8번까지의 교향곡은 이 시기에 작곡되었다. 브루크너는 바그너에게 깊이 심취하여 1865년에는 그와 만나고 작품도 헌정(獻呈)하였으며, 이러한 그의 행동이 절대음악을 중시하는 전통파(反바그너派로 대표격은 한슬리크) 의 반감을 사게 되었으나 이에 저항하는 그를 위해 G.말러, 괼레리히, 샬크형체, 레베 등이 결속하여 그를 도와 주었으며, 그도 '관현5중주곡'(1879) '테 데움'(1881) '제7교향곡'(1883) '제 8교향곡'(1885)의 성공으로 비로소 작곡가로서의 명성이 높아졌다.
만년에는 병에 걸려 음악학교의 직책을 사임하고, 합창곡 '타펠리트'(1893) '헬골란트'(1893) 등 작품을 썼을 뿐 창작보다는 오히려 옛 작품인 교향곡의 개작과 퇴고(推敲)에 힘을 기울였으며 '제9교향곡'을 완성 못하고 사망하였다. 1891년 그는 명예박사학위도 받았다. 또 그는 19세기 후반의 최대 교회음악가였을 뿐 아니라, 최근에는 최대의 교향곡 작곡가로서도 평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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