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읽지 못한 체 쌓여 있는 책들이 꽤 많아, 책을 새로 샀다고 해서 그걸 바로 읽는 편이 아닌데 이 책은 이례적으로 사자마자 읽기 시작했다. 도대체 창조론이라는 것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을지 너무나도 궁금했기 때문에.
그래서 주욱 읽어본 결과, 나는 이 책을 이렇게 요약하고자 한다.
한 준비된 창조과학론자가 무신론자의 가면을 쓰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그곳에서 만난 열렬한 창조과학론 신봉자들에게 차례차례 무차별적인 사고의 관광(閣姦)을 당하는 흥미진진 모험담.
관광(閣姦)이라는 말이 좀 지나치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어쩔 수 없다. 도저히 저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서는 이 책을 뭐라 표현할 길이 없다.
그만큼 이 책이 담고 있는 내용은 매우 선정적이다. 합리적 사고체계가 제대로 자리 잡은 성숙한 사람이라면 괜찮겠지만 그렇지 않은 미성숙자 들에게는 치명적인 정신적 손상을 가할 수 있다. 워낙 궤변에 궤변이 줄을 지어 끊임없이 쏟아지다보니, 자칫 그것에 경도되기 시작하면 어느샌가 저자에 동화되어 같이 관광(閣姦)당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아무리 세상이 좋아졌다고 해도 어떻게 이런 책이 우리나라에서 출판될 수 있는지 의아할 따름이다. 내 짧은 식견으로 더듬어 봤을 때 이와 견줄 수 있을만한 책은 '아키텍처' 정도가 유일하지 않나 싶다.
그러나 또 마냥 그렇지만도 않은 것이, '아키텍쳐'의 경우는 너무나도 어이가 없다는 면에서 형편 없기는 할 지언정 위험하지는 않지만, 이 책은 대단히 형편 없는 데다 대단히 위험하기까지 하다. 내가 문학을 폄하하는 것은 아니지만 소설인 척 하는 '아키텍처'보다는 과학인 척 하는 '창조설계의 비밀' 쪽에 훨씬 문제가 많지 않나 싶다.
게다가 나같은 경우, 이 책을 읽는 내내 끊임없이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감에 시달려야 했는데, 이제 생각해보니 그 불안감의 정체는 이것이었던 것 같다.
'이런 책을 들고 다니는 것을 보고 혹시 누군가가 나를 창조과학론자로 오해하면 어떡하지.'
아, 정말 생각만해도 오금이 저린다. 절대 말리고 싶지만 혹시라도 궁금증을 이기지 못해 이 책을 읽어 보려는 사람이 있다면 필히 무언가로 책표지를 가리길 권한다. 아니면 집에서 몰래 혼자 읽든지.
이 책을 읽기 전만 해도 '혹시나, 정말 혹시나, 이 책이 지금까지의 내 생각을 바꿀 수 있을까?' 하는 미약한 기대까지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책을 읽고 난 지금의 나는, 창조과학론 쪽에 그나마 남겨 두었던 일말의 가능성까지 깔끔하게 날려버릴 수 있게 되었다. 창조과학론이라는 것의 타당성을 주장하면서, 한 인터넷 서점에서는 강력추천까지 받은 책이 이렇게까지 졸렬하다면, 나는 이제 아무런 의구심 없이 창조과학론을 무시해버려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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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racked from dohyun's world 2005/06/08 20:13 삭제
Subject: 창조론 까대기. 창조설계의 비밀.
보면서 어처구니없는 웃음밖에 나오지 않는다. 온갖 궤변과 말장난으로 가득 찬 책. 관련글 : http://www.ondol.org/tt/index.php?pl=356 순환논증의 오류, 권위에의 호소, 비약, 관련성의 오류, 무지에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