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브 액츄얼리'의 여파가 크긴 큰 모양이다. 올해에만 벌써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에, 곧 이어 '새드무비' 까지 두 편의 관련영화가 개봉했으니.
영화는 역시 예상했던 대로 '러브 액츄얼리'의 구조를 그대로 차용하고 있다. 이혼녀와 총각, 아이돌 가수와 수녀, 가난한 신혼부부, 사생아와 전직 농구선수, 노(老)부자와 노(老)배우 지망생, 고용인과 가정부 등 수많은 커플 들이 각자의 사연을 가지고 모였다 헤쳤다를 반복한다. 그 과정에서 서로 얽히고 설키며 커플들 간에 일대다, 다대일의 관계가 또 다시 생성된다. 이래저래 정말 그물과도 같은 인간관계를 선보이는 영화.
일단 전체적인 인상은 최루성 요소가 가미된 '러브 액츄얼리' 정도? 자꾸 '러브 액츄얼리' 이야기를 꺼내서 미안한데 그러면 설명하기 쉬워지니까 어쩔 수 없다. 아무튼 내 인상은 이런데, 아무래도 한국 사람들이 이런 식의 신파에 익숙해서 그런지, 아니면 겨울이 아닌 가을로 개봉시기를 잡다보니 이렇게 된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영화를 보는 내내 나는 그런 인상을 받았다.
클라이막스를 거쳐 결말에 이르는 과정도 수많은 땀과 눈물을 동반하고 있어서 하나같이 기구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 어떤 사람은 발작을 일으켜 죽을 위기에 처하고, 어떤 사람은 수녀가 돼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에 빠지고, 어떤 사람은 병에 걸려서 죽어가고, 어떤 사람은 빚쟁이들이 들이닥쳐 집을 난장판으로 만들고, 어떤 사람은 자식이 유괴 당하고, 어떤 사람은 친구가 자살하고, 어떤 사람은 임신한 아이를 지울지 말지 고민하고. 이거, 아름답다기 보다는 좀 처절한 일주일이 아닌가 하는데.
덕분에 영화가 전체적으로 좀 힘이 들어가 있어서 필요 이상으로 과장된 부분도 몇몇 보이고 배우들의 연기에서도 약간의 감정 과잉이 느껴진다. 그래도 이전에 '러브 액츄얼리'를 보면서 '저걸 한국판으로 찍으면 어찌될까? 한번 보고 싶구나'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는데 뜻하지 않게 그 소원을 풀게 되었으니 그 점에서는 고맙다. 그런 측면에서 생각해보면 이 영화가 정답에 가까운 나름의 해답을 내려준 것 같다는 생각도 들고.
세부적인 이야기를 좀 하자면,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에피소드는 주현, 오미희 커플과 천호진, 김태현 커플의 에피소드였다. 주현, 오미희 커플은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다들 고개를 끄덕일텐데 나 역시 그 커플의 에피소드는 상당히 보기 좋았다. 일단 내가 천성적으로 어리고 젊은 쪽 보다는 연배가 있는 분들이 엮는 굵직한 이야기를 좋아해서 그런 건지도 모르겠다. 그게 아니면 다들 엉엉 울고, 땀 뻘뻘 흘리면서 뛰어 다니고 하는 동안, 그 둘은 오붓하고 담백한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 모습이 유달리 눈에 띄어서 그런 건지도 모르겠고. 어쨌든 한동안 여기저기서 회자될 만한 시네마 천국 오마쥬 신은 영화 내내 감정이 착 가라앉아 있었던 나도 눈물이 핑 돌게 만들었다.
이 커플이야 다들 인정하는 공인 커플일거고 문제는 지금부터 이야기할 천호진, 김태현 커플이다. 아예 이 둘을 커플로 봐야 하는지 부터 논란이 될지도 모르겠는데 기본적으로 나는 남남 커플로 인정하는 입장이다. 즉, 극중 엄정화의 '전남편이 여자보다 남자를 좋아한다'는 폭로를 사실로 받아들이겠다는 말이다. 나는 영화를 보는 내내 천호진은 동성애 경향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기정사실이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그게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어서 그게 오히려 더 놀랍다. 아들 선물과 함께 로션을 슬쩍 내미는 모습이라든지, 그만 두겠다는 김태현을 붙잡고 놓지 못하는 모습이라든지, 마지막에 자신을 간호하는 김태현을 바라보는 모습들을 보고 어떻게 다른 생각을 할 수 있을까.
이런 기본 입장 하에 나는, 천호진이 죽은 친구가 보낸 선물을 붙잡고 통곡하는 장면도 동성애적인 코드로 읽었다. 내가 뭔가 착각을 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그때 흘렀던 짤막한 대화들은 이런 이야기를 전달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천호진은 어린 시절, 우정의 대상이 아닌 사랑의 대상으로 한 친구를 바라봤다. 하지만 그 친구는 그런 천호진을 받아들이지 못했고, 절교와는 다른, 누군가에게 차였다는 기분을 느낀 천호진은 그 친구에게 앙심을 품었다. 그때의 앙금이 남아 도움을 청하는 친구를 외면했고 그로 인해 친구가 자살하자 예전의 감정이 되살아나 그렇게 통곡했던 것이다. 그러던 차에 그의 아픔을 달래줄 남자 가정부가 그의 삶에 들어왔고, 그와 함께 새 삶을 살아가게 된다는 뭐, 그런 내용이라고 생각했다. 앞으로는 일주일에 두번씩 같이 문화생활도 즐겨 가면서 말이지.
나는 당연히 영화를 본 모든 사람들이 그 부분을 이렇게 받아 들일 줄 알았는데 의외로 아닌 모양이다. 하지만 이런 내 생각을 버릴 수가 없게 만드는 것이, 이 영화를 감독한 민규동 씨의 필모그래피에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가 있다는 사실이다. 순수 공포영화였던 전작을 이어 받아, 거기에 여고생 끼리의 동성애 코드를 버무려 또다른 영화로 재탄생 시켰던 사실을 떠올린다면 지금의 내 말에 꽤 무게가 실리지 않는지.
그리고 이건 부차적인 것이지만 천호진을 동성애자로 만들었을 때 얻어지는 이야기 전개상의 이점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바로 엄정화에게 자유를 줌으로써 황정민을 만나는 데 존재하는 장애물을 제거해 버린다는 점이다. 아직까지 서양보다는 이혼녀에게 관대하지 못한 한국의 현실을 돌이켜 볼 때 극중 엄정화가 맡은 캐릭터의 설정에는 다소 무리가 따를 수도 있다. 하지만 '앗, 알고 봤더니 남편이 동성애자 였어'라는 설정을 가져다 붙이면 그런 문제가 나름 깔끔하게 정리가 된다. 남편이 여자는 싫고 남자가 좋다는 데 별 수 없을테니까. 게다가 영화에서 가장 비중 있게 다뤄지는 커플이 엄정화, 황정민 커플이니만큼 이런 장치는 더욱 큰 효과를 갖는다. 뭐, 다 아니라면 극중 엄정화만 괜한 남자, 동성애자 만드는 이상한 여자 되는 거고.
쓰다 보니 장문이 되어 버렸는데 대충 이 정도가 이 영화에 대해 내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들. 하필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성격의 '새드무비'가 개봉을 기다리고 있어서 말들이 많은 모양인데 어떻게 결론이 날지 모르겠다. 개인적으로는 이쪽 손을 들어주고 싶긴 한데, 직접 보기 전에는 모르는 거니까. 그래도 '새드무비'는 왠지 출연한 배우들에 정이 안 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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