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들 잘 모르겠지만 사실 나는 알게 모르게 이 영화와 인연이 깊다. 아마도 화제작, '300'을 보러 용산 CGV에 쭐래쭐래 가던 날이었을 거다. 쓸쓸히 혼자 갔었기 때문에 무인 발권기에서 얼른 표 뽑고 콜라만 하나 사서 들어가려고 걸음을 재촉했다. 그런데 극장 입구에 들어서자 웬 인파가 나를 가로막는 게 아닌가. 이거 뭔가 싶어 주춤했다가 이런 곳에서 시간을 지체할 수는 없다 싶어 인파 사이로 비집고 들어갔다. 그런데 저기쯤에서 익숙한 얼굴이 보인다. 지진희였다. '수' 관객인사라도 했나 보다 하고 다시 갈 길을 가려다가 뭔가 잊은 것, 놓친 것이 있는 것 같아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렇게 강성연까지 보고 나서 나는 다시 무인 발권기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때만 해도 나는 그날 배우들을 직접 본 것이 하나의 커다란 복선이었음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 후, 시간은 흐르고 흘러 '수'가 개봉했고 나는 그 영화를 보러 극장을 찾았다. 영화를 보고 나왔다. 그제서야 나는 뒤늦게 깨달았다. 일전에 용산에서 '수'의 두 주연 배우와 마주쳤던 상황이 주마등처럼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그와 동시에 모든 기억들이 하나의 이야기로 짜맞춰지기 시작했다.
무릇 상영 전 시사는 관객에게 영화를 처음 선보이는 행사로서, 배우든 감독이든 최대한 영화에 대해 좋은 인상을 남기는 것이 주목적이다. 때문에 여타 회견이나 인터뷰에 최대한 친절히 응할 의무가 배우에게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날 내가 봤던 지진희는 분명, 황급히 자리를 피하고 있었다. 마치 관객 앞에서 방귀라도 소리 나게 뀐 사람 마냥 극장 밖으로 줄달음치고 있었다.
강성연도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강성연은 누군가와 인터뷰를 하고 있었는데 매우 난처해하고 있음을 분명히 목격할 수 있었다. 마치 스캔들을 듣고 달려든 기자들과 인터뷰 하는 듯한 모습이었달까. 마지못해 대답은 하고 있지만 시선이 천장을 향해 있고 그 자리를 빨리 벗어나고 싶은 모습이 역력해 보였다.
이건 뭔가. 영화의 얼굴로서 최대한 밝은 모습으로 홍보에 임해야 할 배우들이, 한 명은 나가 버리고, 한 명은 난감해하고 있다니. 하지만 영화를 직접 내 눈으로 확인함으로써 이 모든 게 말끔히 이해됐다.
영화가 별로다.
이 모든 것은 영화가 별로였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배우들은 떳떳하지 못했던 거다. 그냥 별 생각 없이 가서 보고 온 나도 이렇게 난감한데 배우들은 오죽했을까? 온 몸에 멍 자국 찍어가며 했던 연기가 이런 식으로 화면에 담겨지는 걸 보는 배우의 심정이 어땠을지, 전부 이해한다고는 말 못하겠다. 하지만 왜 그렇게 황급히 자리를 떴어야 했는지, 왜 응당 즐겁게 응해야 할 인터뷰에서 그렇게 어두운 표정을 하고 있었는지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게다가 개봉 전부터, 거장의 작품이다, 한국에 유래가 없는 하드보일드 액션물이다 해서 스스로들 얼마나 기대를 하고 어깨에 힘을 넣고 있었을까. 하지만 하드보일드 한 건 영화가 아니라 시사회 후 부끄러움과 난감함에 달아오르는 자신들의 피였던 것이다. 나라도 자리를 피하고 싶었을 거야, 암.
분명 내 기억에 '피와 뼈 '를 통해 만난 최양일 감독은 이렇지 않았다. 그런데 어쩌다 이런 영화를 찍게 된 것일까? 배우의 역량 부족? 언어 소통의 불편함? 한국 영화 제작 시스템에 대한 낯 설음? 정확한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수'가 거장이라는 이름에 어울리지 않는 영화임에는 분명하다.
이 영화는 마치 한국에 하드보일드라는 장르를 본격적으로 소개하는 것이 뭔가 국내에서 낯 설은 일인 것처럼 홍보했다. 물론 한국 영화만 놓고 본다면 어느 정도 들어맞는 말일지 모르겠다. 하지만 얼마 전, 우리나라 관객들은 유례 없는 하드보일드의 융단 폭격을 겪은 바 있다. '씬 시티 ', '300 '이 바로 그 폭격의 주인공들이다. '수' 처럼 홍보할 때 하드보일드라는 수식어를 덕지덕지 붙이고 있지 않아서 그렇지, 이 두 영화야 말로 하드보일드 그 자체. 그걸 알고 봤든 모르고 봤든 이미 세련된 하드보일드 액션물이 관객의 머리에 깊게 각인 돼 있는 마당에 이 정도 영화로는 어림도 없어 보이는 게 사실이다. 그래서 제작사는 굳이 하드보일드 뒤에 클래식이라는 수식어를 하나 더 가져다 붙인 것일까?
과잉 만이 하드보일드라는 장르의 본질은 아닐 텐데 이 영화는 온갖 과잉으로 점철되어 있다. 덕분에 영화를 찍는 배우도 지치고 힘이 들었겠지만 그 영화를 보는 나도 지치고 힘이 든다. 거장의 영화라더니 역시 다르구나, 하는 생각 보다는 나이든 감독이 만들어서 그런지 좀 고루하구나, 하는 생각이 앞서게 된다.
한 물 가버린 스타일을 그대로 되살린다고 해서 클래식이 되는 게 아니다. 기존의 것을 가져오되 작금의 흐름에 맞게 적절히 변용하고 재해석했을 때 진정한 현대의 클래식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 영화를 만든 사람들은 클래식이라는 이름, 하드보일드라는 이름 뒤에 안주해 버린 건 아니었는지. 한국 영화계에 있어 나름 새로웠던 시도가 또 한 번 이렇게 조용히 잊혀지고 스러지게 될까 봐 안타까울 따름이다.
그나저나 지진희는 촬영 전에 운동 열심히 했다면서 구경도 제대로 안시켜 주고 말이야. 영화는 이 장면에서 붕대만 보여줌. 그리고 영화 같이 본 후배랑 '수'라는 게 혹시 물수(水)가 아니냐며 낄낄거렸는데 설마 감독이 진짜 그걸 염두에 둔 건 아니겠지. 영화 여기저기서 물에 대한 묘한 집착이 엿보이길래 혹시나 하고 넘겨 짚어 본 거라. 수산시장에서 회 뜨고 앉았는 것도 그렇고, 죽은 동생을 물에 한 번 적셔주는 것도 그렇고, 또 묻을 때도 물가에, 마지막 장면에서는 물을 맞으면서 끝나질 않나.
아, 그리고 위에 극장에서 어쩌고 하는 이야기는 사실이 반에 내멋대로의 재해석이 절반 이상이니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게 바른 자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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